[2018 가을 호] 낯설고 두려운 타자를 향하여: 선을 넘어-가는 용기
  글쓴이 : 매거진팀     날짜 : 18-10-05 17:14     조회 : 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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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출처 : http://www.insfaction.com/




낯설고 두려운 타자를 향하여: 선을 넘어-가는 용기



글|조 성 엽 기자(매거진 리더십코리아)



“저는 언제쯤 넘어갈 수 있겠습니까?” “그럼, 지금 넘어가 볼까요.”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정상회담이 연일 화제입니다. 이번 문 대통령의 방북만큼이나 판문점에서의 지난 회담도 ‘센세이셔널’ 했는데, 가장 압권으로 저는 위의 두 문장이 떠오릅니다. 군사분계선을 넘어 남쪽 영토인 판문점으로 내려온 김 국무위원장에게 문 대통령이 어쩌면 농담처럼 부러움을 표시하고(“언제쯤 넘어갈 수 있겠습니까?”), 이에 화답하여 김 국무위원장이 문 대통령을 잡아끌어서 북쪽으로 잠깐 넘어갔다가 다시 내려온 사건이었습니다. 한 10초 정도 북쪽에서 이야기하다 사진을 찍고 다시 내려왔지요.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이게 저에게, 어쩌면 다른 많은 사람에게 대단했던 이유는 그 경계선이 그전까지는 아무도 쉽사리 넘을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원래는 절대로 넘으면 안 되는 선이었는데 이렇게 쉽게 넘어지는 것이었나, 하고 말입니다. 많은 사람이 최근 남북 관계를 보면서 그래도 우리나라가 더 나아지는구나, 과거에서 미래로 나아가는구나 하고 생각하는 이유도 이 때문일 거에요. 예전에는 생각할 수 없던 일들이 하나 둘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위의 장면도 그렇습니다. 두 정상이 넘어 다닌 그 선은 원래 넘으면 안 되는 선이었으며, 넘은 사람은 처벌받고 감옥에 가야 하던 선이었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동등하게 어우러지는 사회를 향해: 칸트가 생각한 ‘역사의 진보’와 인간 신뢰

뜬금없지만 이쯤에서 잠깐 철학 얘기를 해 보려고 해요(잠깐만!). 서양 근대의 여러 철학자는 나와 남, 자아와 타자 사이의 경계가 없어지는 게 역사의 진보라고 생각했습니다. 유명한 칸트도 그랬습니다. 칸트는 우선 인간이 거칠고 야만적인 상태에서 벗어나 문화적이고 도덕적인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려면 교육을 받아야 하고, 교육이 가능하려면 교육 제도와 국가가 잘 서 있어야 하는데, 자꾸 전쟁이 일어나서 국가를 헝클어뜨리고 제도를 망쳐놓으니까 전쟁을 없애기 위해서 국제기구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세계시민주의). 그러면 모든 사람이 도덕적으로 서로를 존중하고 사랑하는, 이상적인 사회가 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칸트 역사철학에는 프랑스혁명과 박애 정신에 대한 신뢰가 묻어납니다. 칸트는 프랑스혁명을 눈앞에서 목격한 세대입니다. 칸트는 자기관리의 화신이어서 오후 세 시마다 산책을 다녔는데, 어찌나 정확했던지 마을 사람들이 칸트를 보면서 시계를 맞출 정도였다고 해요. 그런데 칸트가 산책을 빼먹은 날이 평생 딱 이틀 있었는데, 하루는 루소의 책을 읽다가 너무 몰입한 날이었고 다른 하나는 프랑스혁명을 알리는 신문을 읽던 날이었다고 해요. 그 정도로 놀랍고 대단했다는 뜻이었겠지요. 그래서 칸트는 역사의 진보를 의심하는 사람들에게 프랑스혁명을 바라보라고 말합니다. 자유, 평등, 박애; 얼굴도 모르는 사람의 자유를 위해 기꺼이 전쟁터로 나서서 죽어간 프랑스 민중들을 보면 인간에 대한 신뢰를 가질 수 있다고 말입니다.

국제연합(UN)과 유럽연합(EU)은 칸트식의 세계시민주의가 남긴 유산입니다. 경계를 지우고 모든 사람이, 나와 네가 동등하게 살아가는 사회를 만들려는 노력의 일환입니다. 지금 유럽연합이 휘청거리는 이유도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영국이 유럽연합을 뛰쳐나간 이유 중 하나는 난민 문제였다고 해요. 유럽연합에 남아 있으려면 쿼터대로 난민을 수용해야 하는데, 그걸 더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시민권을 가진 사람과 시민권이 없는 난민 사이의 구별과 분리. 이것은 가진 사람에 의한, 없는 사람의 배제이며 위의 기준에 의하면 역사적 퇴보의 징후입니다. 멀리 유럽 얘기만이 아니라 우리나라도 비슷하다고 생각해요. 구별과 분리를 어디서든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한국 사람과 예멘 사람, 남성과 여성, 수도권과 지방, 명문대와 지잡대 등등.




혐오는 언제나 타자를 겨눈다

혐오는 구별의 결과입니다. 자기와 똑같은 사람을 혐오하진 않으니까요. 혐오의 대상은 항상 나와 달라 보이는 타자입니다. 유럽에서든 한국에서든 난민이 두드러지게 혐오의 대상으로 내몰리는 이유도 이 것입니다. 딱 봐도 다르게 생겼으니까요. 한국에서 많이 얘기되는 ‘여성 혐오’도 똑같습니다. 여성을 혐오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그렇게 얘기하죠, 여성을 혐오하는 사람은 남성이거나 남성 중심주의적 문화에서 교육받은 사람입니다. 남성은 여성이 아니고 여성은 남성이 아니며, 여성과 남성은 서로 다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젠더폭력이 여성 혐오의 사례인 이유는, 일반적으로 젠더폭력은 여성이 겪는 문제이며 오로지 ‘여성만이’ 겪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극단적인 예를 들자면 아내가 남편에게 맞지, 남편이 아내에게 맞지는 않으니까요. 그래서 젠더폭력은 여성이 처한 위험이자 여성 혐오의 사례가 됩니다. 여성의 타자, 곧 남성이 여성에 대해 행사하는 폭력이기 때문입니다.




혐오의 숨은 뿌리: 두려움

다만 모든 사람이 자기와 다른 사람을 혐오하지는 않습니다. 난민을 배척하지 않는 시민도 많고 여성을 혐오하지 않는 남성도 (가끔)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구별이 곧 혐오와 똑같은 건 아니고 구별이 혐오로 이어지는 이유가 필요한데, 저는 두려움이 그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비유하자면 구별은 장작 같은 거고, 여기에 두려움이 끼얹어지면 혐오로 타게 된다고 생각해요. 나와 다른 존재는 낯설고, 낯선 존재는 으레 두려움의 대상이 됩니다. 지난달에 광화문에서 예멘 난민 수용에 반대하는 시위가 있었는데, 그 시위에서의 구호가 구별과 낯섦과 두려움의 멘탈리티를 잘 보여준다고 생각해요: “혐오가 아니다, 안전을 원한다!” 그러니까 난민은 낯설고 위험한 존재라는 뜻이겠지요.

반달가슴곰은 겁이 많으면서 난폭한 동물이라고 해요. 겁이 많으면서 난폭하다는 게 이상한데, 생각해 보면 당연합니다. 겁이 많으니까 난폭한 것이겠지요. 저는 사람도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만약에 외계인이 갑자기 지구에 나타난다면 이들을 가장 먼저 맞이하는 인간은 아마도 미군일 겁니다. 우선 전투기를 띄우고 총을 겨눈 채로 시작할 거에요. 사실 그게 당연합니다. 왜 왔는지 모르니까요. 낯선 존재란 이렇게 무섭습니다. 반대로 그래서 나와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필요한 건 용기입니다. 누군지 모르고 그래서 나를 해칠지도 모르는 타자에게 먼저 손을 내미는 용기 말이에요. 정상회담을 보면서 불안감을 느끼는 사람들도 여전히 많습니다. 핵무기 숨겨놓고 아닌 척 한 거면 어떡하냐, 우리나라만 무장해제하고 통째로 넘기고 그런 거 아니냐, 이런 건데 나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역사의 진보를 성취하며 미래로 나아가려는 시점에서 필요한 것 중 하나는 다름 아니라 인간에 대한 신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게 그렇게 순진한 생각만도 아니라고 칸트는 생각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