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가을 호] 현실과 이상의 접점에서, 안중근
  글쓴이 : 매거진팀     날짜 : 17-09-27 10:32     조회 : 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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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 안중근 의사가 수감되어 있던 독방. 이곳에서 <동양평화론>을 집필하다가 미완성한 채로 죽음을 맞이했다.
△사진2. 뤼순감옥. 방문객들이 그의 독방 안팎을 살피고 있다.
△사진3. 안중근 의사 처형장. ‘의로운 사람’이라는 글귀가 눈에 띈다.








현실과 이상의 접점에서, 안중근





평화주의자가 누군가를 저격하는 모습은 선뜻 어울리지 않는 그림이다. 평화는 비폭력과 통하는데, 저격은 폭력적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필자가 안중근 의사의 사상과 결단이 이질적이라고 여겼던 이유다. 안중근 의사는 <동양평화론>이나 <인심결합론>에서 상호 화합과 평화를 강조했는데, 그가 택했던 방식은 그 가치를 포기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시대상황과 그에 대해 알아갈수록 그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다른 관점에서 생각해볼 수 있었다.

지난여름, 필자는 약 20명의 팀과 함께 중국 하얼빈-연길-대련 일대를 다녀왔다. 박명림 선생님(연세대학교 대학원 지역학 협동과정 교수)이 동행해 답사를 지도했다. 이하는 여정과 이후, 함께 배우고 대화하면서 변화한 생각을 정리한 내용이다.





안중근 의사는 무사 집안에서 태어나, 어릴 적부터 말 타고 활 쏘는 사냥에 소질이 있었다고 한다. 아버지 안태훈을 따라 소년 시절 동학군 토벌에도 참여했던 그는, 20대 후반에 교육운동에 힘쓰다가 1907년 불평등조약으로 대한제국의 군대가 해산되자 의병에 가담한다. 그가 하얼빈에서 거사를 앞두고 쓴 <장부가>에는 “천하를 응시”하며 “때”를 묵상하는 마음이 담겨있다. 그는 일본 제국주의에 대항해 복합적인 정치상황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으로, 의거를 그의 운명으로 받아들였던 듯하다. 그렇다고 그가 영웅심리에 취해 있었다고 볼 수 없는 이유는, 이토가 탄 열차가 먼저 도착하는 채가구 역에서의 거사를 동지 우덕순과 조도선에게 맡겼기 때문이다. 채가구에서 실패하면 하얼빈에서 안중근이 보완해 실행한다는 작전이었다.

필자는 안중근 의사의 의거를 떠올릴 때, 마음 한 켠에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말이 떠올라 과연 저격이 적합한 선택이었나 의문이 들었었다. 그러나 선악을 방법론적으로 판별할 수 있는가 반문이 생겼다. 팀원들과 함께 의견을 나누던 중에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사례가 나왔다. 본회퍼 목사는 나치 독재 치하에 급기야 히틀러 암살 계획에 가담한다. 체포돼 죽음을 맞이했지만, 그는 ‘미치광이가 버스 운전석에 있다면, 사상자들의 장례를 치르고 위로할 뿐만 아니라 미치광이를 운전대에서 끌어 내려야 한다’고 말했다. 목숨을 앗는 행위를 긍정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러나 달리 보면, 그 대가를 치르면서까지 더 많은 생명을 살리고 싶은 희생정신 아닐까.

안중근 의사가 1909년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이후 수감되어 있었던 뤼순감옥은, 우리나라 서대문형무소와 같은 곳이다. 피서기인 8월 초에도 방문객으로 붐볐다. 안중근 의사가 갇혀 있던 독방 벽면에는, 그를 한∙중∙일∙영어로 소개하는 글이 동판에 새겨져 있다. 중국인 방문객들도 책걸상이 구비된 방 안을 유심히 들여다보고 글귀를 읽었다. 이곳에서 그는 항소권을 포기하는 대신, <동양평화론>을 집필해 그가 의거한 목적을 전하고자 했다. 당시 히라이시 고등법원장은 사형집행일을 15일 정도 연기해 집필 기간을 확보해주겠다고 약속했지만, 글의 내용이 두려웠던 일제는 이를 어기고 그를 1910년 3월 26일 교수형에 처했다. 안중근 의사의 처형장과 추모관은, 그가 남긴 유묵이나 편지 내용과 함께 단독으로 마련돼 있다. 그가 국경을 초월해 중국에서도 존경받는 풍경이었다.


관동법원에서의 최후 공판 기록을 보면, 안중근 의사가 “모두 법률 아래에서 생활하고 있다 […] 살인을 해도 아무런 제재를 가하지 않는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며 무죄를 주장하던 본인 변호인의 말까지 반박하는 부분이 있다. 그만큼 그는 사사롭지 않게 ‘의’를 올곧게 추구하던 사람임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결코 개인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의병 중장의 자격으로 한 것’이라며 자신은 국제법에 의해 포로라고 밝힌다. 그를 감시하던 일본인 간수 치바 도시치가 대대로 안중근의 유묵을 가보로 삼고 그 정신을 기렸다는 사실에서, 그가 행한 신념이 실제로 개인이나 국가를 초월함이 드러난다. 당시 그가 법원에서 이토 히로부미에 대해 “한일 친선을 저해하고, 동양의 평화를 어지럽힌 장본인”이라며 일본 군국주의를 고발한 내용은, 언론을 통해 국제사회에 전해졌다. 그러나 일본제국은 국제정치적인 사건에 끊임없이 ‘개인, 살해’ 프레임을 씌웠다.


안중근 의사는 군국주의라는 거대한 구조적 폭력에 의해 희생 당하고 고통 받는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급박하게 전개되는 상황 가운데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했다고 사료된다. 당장 이토 히로부미가 한국과 만주∙몽골 지배를 놓고 러시아 재무대신과 협상하기 위해 하얼빈에 방문했을 때, 비폭력 시위를 했더라도 현실적으로 그 흐름을 막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국제적인 여론을 형성하기에도 시간이 부족했고, 이는 미약하게나마 관동법원에서 실현됐다. 그리고 실제로 그가 이토를 처단한 이후, 일본 군국주의 반대 투쟁이 곳곳에서 시작됐다.

안중근 의사는 의연하게 죽음에 임하던 마지막 순간까지 평화를 염원했고, 의거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며 후대에 그 가치를 실현해주기를 부탁했다. 안중근 의사의 결단과 삶을 보고, 방법은 선해 보여도 실상은 교묘하게도 폭력적인 경우들이 떠올랐다. 친일행위는 일제와의 ‘협력’이라는 명분 하에 민족말살이라는 정신적∙물리적 폭력에 동조하고, ‘안위’를 챙겼다. 심지어 독립운동을 함께했어도 결국 이념 갈등으로 인해 서로를 죽였고,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안중근은 이를 내다보고 ‘인심결합’과 화합, 평화를 부르짖었던 것 아닐까.




글 김민경 기자